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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긴급통화·금융조치

우리나라의 통화조치

1953년 긴급통화·금융조치

1. 배경과 근거

한국경제는 전쟁으로 인한 생산활동의 위축과 그간의 막대한 군사비 지출 등으로 인플레이션 압력이 심화되었다. 또한 세원 포착이 어려워 세수는 부족한 반면 전비지출이 많아 재정적자가 누적되었고, 통화의 대외가치 폭락으로 무역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나라는 1952년 5월 연합군사령부와 경제조정협정을 체결함으로써 1억 달러에 달하는 대 유엔군 대여금을 상환받고 미국을 비롯한 각국으로부터 원조를 받게 되었으나, 이로 인한 통화증발에 대해 근본적인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

정부는 이에 대응하여 1953년 2월 긴급통화·금융조치를 단행했다. 동 조치는 2월 15일 대통령 긴급명령 제13호 「통화에 관한 특별조치」로 단행된 긴급통화조치와 2월 27일 「긴급금융조치법」(법률 제227호)에 의해 실시된 긴급금융조치로 나누어 실시되었다.

긴급통화조치시 화폐교환 창구

긴급통화조치시 화폐교환 창구

2. 주요 내용

긴급통화조치는 전후 인플레이션을 조기에 수습하고 안정된 통화가치의 기반 위에서 금융, 산업활동을 영위하게 하도록 단행되었으며 화폐가치를 100대 1로 절하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였다. 1953년 2월 17일부터 구원화(舊圓貨) 표시 한국은행권의 유통을 금지하고, 새로 발행되는 환(圜)화 표시 한국은행권을 법화로 통용토록 하되 교환비율을 100원 당 1환으로 하였다. 이외에 2월 25일까지 구권과 어음·수표 등을 모두 금융기관에 예입하도록 했다.

다음으로 긴급금융조치는 예금의 일부를 동결하기 위해 실시되었다. 이에 따라 기존 예금(저축성예금 제외)은 10만 환 이상, 긴급통화조치에 의해 예입된 구권예금은 3만 환 이상을 대상으로 20~100%의 금액별 체증률을 곱해 산출된 금액이 특별정기예금 또는 특별국채예금으로 전환되었다. 한편 한국은행은 긴급통화·금융조치 후 산업자금 조달에 어려움이 커지자 긴급산업자금 융자제도를 도입하여 약 한 달간 운영하였다.

통화조치의 구권 회수 총액은 조치 전일인 2월 14일의 화폐발행잔액 11,367억원의 97%에 해당하는 11,065억원이었고, 수표 등 기타 지급수단 회수액은 1,198억원으로 이를 합하면 1조 2,263억원에 달하였다. 그 결과 1953년 2월 17일부터는 다섯 종류의 새로운 한국은행권이 발행되며 원화 표시 경제가 1/100로 명목절하된 환화 표시 경제로 이행되었다.

1953년의 긴급통화‧금융조치는 당시 통화증가 요인이었던 유엔군 대여금의 상환을 촉진하는 등 통화량 급증을 억제하여 급격한 인플레이션을 저지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화폐단위를 조선은행 시대의 잔재인 원(圓)에서 한국은행 시대의 환(圜)으로 바꾸고, 명목가치 절하를 통해 거래비용의 증가를 다소나마 해소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긴급통화조치 종합보고서

긴급통화조치 종합보고서

긴급통화조치 세칙 및 사무취급요령

긴급통화조치 세칙 및 사무취급요령

통화조치 파견원 지도일지

통화조치 파견원 지도일지

3. 화폐 이야기

1953년 2월 17일 발행된 미국 제조 은행권은 평판인쇄된 것으로서 해방 이후 발행된 어떤 은행권보다도 고급용지를 사용한 고품질 은행권이었다. 즉 형광물질이 들어있는 잉크를 사용함으로써 자외선을 비추면 붉은 바탕이 금빛으로 변하고 번호의 검정색이 갈색으로 바뀌는 데다, 은행권 용지에 색사(色絲)를 넣어 위조가 어렵게 특수제조된 것이었다. 1,000환권, 100환권, 10환권은 색상만 서로 약간 다르고 크기와 도안이 모두 같았는데, 앞면에는 거북선, 뒷면에는 한국은행 휘장이 사용되었다. 5환권과 1환권은 크기가 같고 색상도 유사하였으나 앞·뒷면에 각각‘ 오원’ 및‘ 일원’이라는 글자가 인쇄되어 있었다.

1,000환권

1,000환권

100환권

100환권

10환권

10환권

5환권

5환권

1환권

1환권